Pen-name specimen
26년 7월의 회고
필명으로 남겨진 문장을 천천히 펼쳐 읽습니다.
끝없는 터널 속을 무던히 걸어갔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어느 날 눈을 떴더니 어둠이 내 곁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저 그것을 피해 걷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그러나 오래 걸을수록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터널은 나를 가둔 곳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살아온 길의 모양 그대로였다는 것. 나는 밖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 안에 길게 뚫려 있던 어둠을 따라 걷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벽에는 축축한 이끼가 붙어 있었다. 손끝으로 스치면 오래된 감정처럼 물기가 묻어났다. 쉽게 마르지 않는 것들. 아무리 잊었다고 믿어도 어느 날 문득 손바닥에 다시 배어 나오는 것들. 터널 안에서는 멀리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고, 꾸짖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곳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소리는 많았지만, 나를 향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사랑을 잘 몰랐다. 사랑은 따뜻한 것이라고들 했지만, 내게 사랑은 자주 문단속과 닮아 있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 조심해야 할 것, 틀리면 안 되는 것이 많았다. 나를 위한다는 말은 대개 나를 묶는 방식으로 도착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법보다 숨는 법을 먼저 배웠다.
굳게 닫힌 방문 안쪽에는 슈퍼싱글 침대 하나가 있었다. 그 침대는 내가 가진 가장 좁은 세계이자 가장 넓은 도피처였다. 나는 그 안에서 자주 잠을 잤다. 잠을 잔다기보다 사라지는 연습을 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만큼 오래 누워 있었고, 창밖의 빛이 바뀌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세상은 계속 움직였지만, 내 방 안에서는 시간만 눕고 또 누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다. 숨을 쉬는 데에도 기운이 필요했고, 누군가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데에도 마음을 모아야 했다. 방문 밖에서는 생활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누군가의 발걸음, 낮게 오가는 말들. 그러나 그 모든 소리는 내게 닿지 못했다. 나는 방 안에 있었고, 방은 내 안에 있었다.
중학생 때 나는 한 번 투명해진 적이 있다.
정확한 이유는 끝내 듣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은 나를 보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내가 지나가면 말이 끊겼으며, 내가 앉은 자리 주변에는 묘한 빈자리가 생겼다. 처음에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어떤 표정이 문제였는지, 어느 순간부터 어긋났는지 밤마다 되짚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이 없는 벌은 오래 남는다.
차라리 누군가 내게 이유를 말해주었다면, 나는 그 이유를 미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없으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내가 문제인가. 내 말투가 이상한가. 내 얼굴과 걸음, 내가 웃는 방식과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가. 나는 그렇게 나를 하나씩 검열했고, 어느새 나 자신 전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누군가의 작은 친절에도 쉽게 흔들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그것만으로도 오래 굶은 사람처럼 마음이 기울었다. 관심은 내게 빛처럼 보였고, 애정은 출구처럼 보였다. 그러나 빛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종종 스쳐 가는 손전등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잠시 나를 비추고 지나갔다. 그들은 나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주 구원받는 상상을 했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너무 많이, 너무 오래, 너무 서툴게.
그래서 정작 사랑을 줘야 할 때, 나는 자주 실패했다. 누군가 내 곁에 있어도 그 사람이 언제 떠날지만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아껴주면 그 마음을 믿기보다 잃을 준비를 먼저 했다. 나를 버리지 말라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때로는 상대를 지치게 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면, 사랑은 부탁이 아니라 굶주림이 된다. 나는 내 안의 허기를 사랑이라 착각한 적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붙잡아야 할 때 밀어냈고, 기다려야 할 때 의심했으며, 고마워해야 할 때 두려워했다. 내 마음이 아프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날들이 있었다. 이제 와 그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른 척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었지만, 상처만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한때는 내 불행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가족 때문이라고, 학교 때문이라고, 나를 지운 사람들 때문이라고, 나를 너무 엄격하게 사랑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떤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망가뜨리고, 어떤 침묵은 폭력보다 오래 사람을 따라온다. 나는 분명히 아팠고, 그 아픔에는 시작점이 있었다.
하지만 원망은 돌아오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원망해도 닫힌 방문은 저절로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과거를 뒤져도 투명해지기 전의 나를 온전히 되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의도치 않게 태어났고, 의도치 않게 불행해졌다. 그리고 그 불행을 부정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이 질문을 수십 번, 수백 번 되풀이했다. 어떤 날에는 답이 부모에게 있었고, 어떤 날에는 오래전 교실에 있었으며, 어떤 날에는 내 못난 마음에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답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은 한 사람의 잘못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한 가지 사건으로만 망가진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날들이 나를 조금씩 비틀었고, 나는 그 비틀림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는 말은 늘 거창하게 느껴졌다. 내게 그것은 영웅적인 일이 아니라, 그저 아침에 눈을 뜨고 다시 숨을 쉬는 일에 가까웠다.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삶을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삶을 좋아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어떤 날에는 나 자신이 너무 버거웠고, 어떤 날에는 내 안의 공허가 너무 커서 그 속으로 그대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 선 사람처럼 살았다. 언제든 떨어질 준비가 된 사람처럼. 그러나 이상하게도 끝내 떨어지지는 않았다. 붙잡고 싶은 것이 있어서라기보다, 아직 놓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희망이었는지, 미련이었는지, 습관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 나를 두고 갈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사람은 결국 나였다.
나는 어딘가에 어린 나를 두고 온 듯했다. 사랑받고 싶어서 눈치를 보던 아이. 이유도 모른 채 혼자가 되었던 아이. 방문을 닫고 침대 안으로 숨어들던 아이.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밝아지고, 누군가의 무심함에 며칠씩 무너지던 아이. 나는 그 아이를 오래 미워했다. 왜 그렇게 약했느냐고, 왜 그렇게 매달렸느냐고, 왜 아직도 내 안에서 울고 있느냐고.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 아이는 나를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나를 지금까지 데리고 온 사람인지도 모른다. 울면서도 버틴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방 안에서 그래도 다음 날까지 몸을 끌고 간 사람. 사랑을 잘못 배웠지만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는 일을 놓지 않고, 계속 어딘가를 바라본 사람.
나는 그 아이에게 이제 그만 울어도 된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세상은 갑자기 다정해지지 않았고, 터널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도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울 것이고, 누군가의 작은 온기에 지나치게 흔들릴지도 모른다. 어떤 밤에는 여전히 내가 나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내게 구원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사실이 예전만큼 절망스럽지는 않다.
구원이 없다는 것이 곧 끝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발밑의 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둠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안에서 한 걸음 내딛는 법은 조금 안다. 벽의 이끼가 손에 묻고, 멀리서 들려오는 고함이 다시 나를 작아지게 해도, 나는 이제 안다.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나는 더 이상 내 불행을 전부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내게 일어난 일이었고, 나를 바꾼 일이었으며, 지금의 나를 만든 일부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의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상처였지만 상처만은 아니었고, 외로움이었지만 외로움만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미워한 사람이었고, 동시에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조금 충분했다.
터널 안의 어둠은 그대로였다. 명도는 변하지 않았다. 벽은 여전히 축축했고, 발소리는 여전히 혼자였다. 멀리 어딘가에서 고함 같은 소리가 울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조금 더 가다 보면, 벽의 갈라진 틈으로 아주 작은 빛 하나쯤 새어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를 구원할 만큼 크지 않아도 괜찮았다. 손바닥 하나 데우지 못할 만큼 희미해도 괜찮았다. 나는 이제 거대한 빛을 기다리느라 더는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완전히 사랑하지는 못한다. 아직은. 어쩌면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나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울고 있는 나, 비뚤어진 나, 사랑을 몰라 사랑을 망친 나, 그래도 사랑받고 싶었던 나, 어둠 속에서 몇 번이고 멈춰 섰지만 끝내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은 나.
나는 그런 나를 데리고 다시 걷기로 했다.
끝없는 터널 속을.
무던히.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내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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