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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ous specimen

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

이름 없이 남겨진 문장을 표본지처럼 조용히 읽습니다.

작성일 조회 25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가, 길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떨어졌다. 우산을 챙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조차 애매한 날이었다. 창밖을 오래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꼭 저 날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가도 다시 미련이 생기고,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다가도 혹시 한 번만 더 해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코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코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며 버텨온 사람이었다. 눈을 뜨면 가격을 확인했고, 잠들기 전에도 차트를 봤다. 시장은 하루도 쉬지 않았고, 나 역시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수익이 난 날에는 내가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고, 손실을 본 날에는 내가 살아온 방식 전체가 틀린 것 같았다. 돈을 벌고 잃는 일이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한 손익으로 끝나지 않았다. 숫자는 내 기분이 되었고, 차트는 하루의 표정이 되었다. 초록색과 빨간색의 작은 막대들이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까지 결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전업 생활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일 하나를 그만두는 것이라면 조금 덜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내가 믿어온 가능성을 접는 일이었고, 몇 년 동안 매달려온 시간을 인정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이 길을 택했다고 생각했다. 출근 시간도, 상사도, 정해진 월급도 없는 삶.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내 판단만으로 살아가는 생활.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는 자유로웠던 만큼 늘 불안했다.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대신, 어디에도 제대로 기대지 못했다. 시장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시장보다 먼저 지치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것 같았고, 다음 기회를 잡으면 그동안의 시간이 모두 설명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마저 나약함으로 여겼다. 견디지 못한 사람만이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만두는 것이 정말 패배인지, 아니면 더 이상 나를 소모하지 않겠다는 결정인지. 오래 걸어온 길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 도망인지, 그제야 나에게 맞는 길을 찾아보는 일인지. 아직은 어느 쪽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전업 코인 생활을 포기한다고 해서 시장을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한동안 습관처럼 차트를 열어볼 것이고, 내가 팔고 난 뒤 오른 코인을 보며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오래 살아온 방식을 하루아침에 지울 수는 없으니까. 다만 이제는 코인 밖에서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보고 싶다. 수익이 나지 않은 날에도 하루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보고 싶고, 숫자와 관계없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 시장의 속도가 아니라 내 속도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싶다. 창밖에는 다시 비가 내리고 있다. 아까보다 굵어진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있으면 또 그칠 것 같기도 하다. 날씨는 끝내 어느 쪽으로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하루를 지나가고 있다. 나도 아직 그렇다. 완전히 떠날 용기도, 아무렇지 않게 남아 있을 자신도 없다. 그래서 오늘은 결론을 내리기보다, 그저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새로운 삶은 확신을 가진 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했던 것을 천천히 놓아보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비는 여전히 오다 말다 한다. 그래도 잠시 차트를 닫고 창밖을 바라본 동안만큼은, 시장이 아니라 내 쪽으로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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